[Jassy의 차이야기 여섯번 째] 우아하게 반전

김원경 승인 2020.12.30 13:31 | 최종 수정 2020.12.30 13:44 의견 0

한국식으로 만들어본 막걸리가 제법 잘 익었네요. 맛이나 보시라구요. 한인 사이트에 연말 초대 글이 올라왔다. 이민 온 지 팔 년 만에 무려 막걸리라니. 굉장한 파티야. 
입맛을 다시는데 띵동 댓글이 다시 올라온다. 
코로나로 모임 취소합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소중한 것은 죄다 평범한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가 뒤통수에 댓글을 날려대고 있다. 띵동 아드님과의 영화 관람이 취소되었습니다. 띵동 따님과의 핼리팩스 쇼핑 여행이 취소되었습니다. 띵동 남편님이 지붕 수리를 취소하셨습니다.

우아하게 반전이 필요하다.
선반에서 찻잔을 하나씩 꺼내어 테이블 위에 세팅해본다. 이렇게 저렇게. 더 화려하게. 
막걸리보다 달콤하게.

애프터눈 티파티를 하는 거다.
차의 세계, 이 바닥에서 최고의 세팅이라 불리는 차림.

애프터눈 티파티는 1850년경 영국 사교계의 전설 애나 마리아가 시작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티타임이다. 

산업 혁명으로 가정에서도 늦게까지 불을 밝힐 수 있게 되자 영국의 저녁 식사 시간도 자연 늦어지게 되었는데 애나 마리아는 사슴 사냥에서 늦는 남편을 기다리며 우울한 시장기를 달래려 차를 마시곤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차를 마치 약처럼 여기던 때라 공복에 마시는 것을 피하려 빵과 버터, 비스킷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사교계 여왕의 우아한 습관은 유행이 되고 1859년 진짜 여왕 빅토리아까지 애프터눈 티파티에 참석하자 식사 전 우아한 티타임은 영국의 새로운 사교 공식이 되었다. 

애나 마리아처럼 격식 있게 테이블을 꾸며본다.
빅토리아풍 앤슬리(Ansley)로 기본 세팅을 하고 모던한 소품을 믹스 매칭한다. 똑같은 패턴이 아니라도 좋다. 시간대를 널리 쓰면 표현이 더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실버 티포트와 스푼, 나이프 플레이트도 꺼내고, 리모지 화병에 장미를 꽂아본다.

스피커에서 BTS 지민의 새 노래 Christmas love가 나온다. 저 노래 가사에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걸 번역할 단어가 없어서 전 세계 아미들이 고민이란다. 'falling falling'이라고 번역한 미국 유튜버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BTS처럼 애프터눈 티의 유행도 귀족을 넘어 전 세계 보통 사람들에게 까지 널리 퍼졌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돈이 덜 들기 때문이었다. 만찬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최고의 사교를 즐길 수 있었다.

일종의 소확행일까. 
쁘띠 사치. 
집은 못 사지만 명품 시계쯤은 찰 수 있다거나 명품백은 못 들어도 에르메스 립스틱은 발라줘야 하듯이.
최고의 차를 100년 묵은 보물 찻잔으로 마시며 꽃잎처럼 수놓은 다과들을 우아하게 집어 든 이 순간만큼은 내가 제일 잘나가는 사교계의 여왕이요 취향의 전설이다.

장미 무늬에 금테가 둘린 로얄 첼시를 추가로 꺼내온다. 작지만 확실하게 행복한 무언가가 필요한 오늘, 이 잔이라면 막걸리를 따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에프터눈 티의 하이라이트는 삼단 트레이 'Three tire tray' 다.
고소한 스콘을 촉촉하게 굽고 달콤한 무스 케이크와 한입에 쏙 들어갈 정도로 앙증맞게 조각낸 과일을 삼단 접시에 차곡차곡 올린다. 병뚜껑으로 빵을 동그랗게 오려 훈제 연어를 올려 샌드위치를 만든다. 빅토리아 시절에는 오이 샌드위치가 최고의 샌드위치였다. 온실에서 키운 오이는 아주 비쌌으니까. 

마지막으로 티 스트레이너를 고른다. 티테이블을 보석같이 빛나도록 완결 점을 찍어줄 애. 몇 해 전 파리 생뚜앙에서 가슴 졸이며 대서양을 함께 건넌 은으로 만든 티포트 걸이식 스트레이너를 골랐다. 관리도 까다롭고 쓰기 편하지도 않으면서 가격만 비싼 귀하신 몸.

권위와 격식을 위한 물건의 공통점은 원래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만든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오직 한 사람을 누이기 위해 만 명의 집을 허물었다. 파덱 필립 시계는 만 원짜리 전자식 손목시계만큼 정확하기 위해 삼십억 원 어치 부품을 쓴다. 공작의 깃털은 달아나다 잡히기 쉽도록 길고 아름답게 진화했다.

티포트의 주둥이에 티 스트레이너의 은으로 된 철사를 걸어 조심히 차를 따른다. 여차하면 떨어져서 소중한 찻잔 모서리를 깨 먹도록 세심하게 잘 디자인되어있다.

오이가 훈제 연어가 될 만큼 세월은 흘렀으나 애프터눈 티 세트의 화려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그대로다. 나를 어서 극진히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난다.

다 말리는 코로나의 한중간에서 찻집을 열기로 한 나의 무모함에 한 잔.
코로나가 물러나서 사람들이 다시 따뜻하게 악수하는 평범할 내년에 한 잔. 

막걸리 마시듯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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