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세 번 째] 우아한 승리, 앤슬리

김원경 승인 2021.02.17 15:11 | 최종 수정 2021.02.17 15:24 의견 0

어머나 깜빡 잠이 들었나봐. 

우당탕 모니터를 켠다.
마감 직전. 5분 남았다. 

현재 온라인 경매가 750달러.
경매가 300달러쯤에서 잠시 쉬려다 잠이 들었는데 그새  750달러까지 올라갔다.
몇 년을 기다려 찾아낸 기회, 그 귀하신,  1934년산 앤슬리, 수석 디자이너 베일리가 직접 사인한 최상급 24K 장미 찻잔을 소장할 수 있는 드문 찬스가 사라지기 직전이다. 아마 모니터 너머의 수집가는 750불에서  초조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나를 도와 마감 5분 전에 잠에서 깨웠으니 꿈 깨시지. 

비딩 버튼을 누른다. 
'딩동, 현재 경매가 800달러로 올리셨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 3분 30초.
마른 침을 꼴깍 삼킨다.
모니터 속 빨간 숫자가 신경질적으로 800을 여전히 점멸하고 있다. 

타임 바는 짧아진다. 3분. 2분. 1분 남았습니다. 

‘You won'
낙찰됐다.
기뻐서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자던 남편이 놀라 깼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하이톤으로 아슬아슬했던 승리를 말했더니 에효, 긴 한숨을 쉬며 남편이 전자담배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수집가들이 최고로 모시는 찻잔 브랜드 중 나는 영국의 파라곤, 앤슬리, 쉘리를  탑3로 꼽는다. 그 외 웨지우드, 로얄 스탠다드, 콜포트, 로얄 알버트 , 로얄 첼시, 프랑스의 리모지, 하빌랜드 등 꽤 많은 역사적인 앤틱 찻잔 공방들이 있다. 
그중 앤슬리는 나의 첫 앤틱 찻잔으로 각별하다. 
코르셋 모양으로 허리가 잘록한 핑크빛 앤슬리 찻잔 
을 처음으로 구해서 애지중지하던 차에 남편이, 평소 안 하던 설거지를 갑자기 한다고 설치다가 손잡이를 댕강 부러뜨리고 말았다. 남편 허리를 부러뜨리고 싶은 분노를 참아내느라 며칠 요가를 해야 했다.
그렇게 여리고 아름다웠던 코르셋 앤슬리를 떠나보낸 탓인지 앤슬리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시대를 초월한 세련된 디자인과 기품에 벌써 여러 패턴을 모았지만 늘 숙제처럼 남은 앤슬리 찻잔이 바로 저 베일리가 사인한 24K 장미 찻잔이었다. 

경매에서 이긴 다음날 몽튼의 유일한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청하는 전화가 왔다. 워낙 조용하고 한가한, 
뉴스 거리가 많지 않은 작은 도시라지만 이게 뉴스에 나올만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 망설이자 기자가 말한다. 

당신이 마니토바주의 경쟁자를 이긴 거에요 

몽튼 옥션이 인지도가 높아져서 미국이나 캐나다 다른 주의 수집가들까지 이번에 참여했는데 막판에 
한국에서 온 제시 킴이라는 여자가 최종 경쟁자 마니토바의 비더를 이기고 찻잔 하나 값으로는 최고가를 기록했으니 뉴스거리라는 것이다. 

승리의 앤슬리를 가져다 다른 찻잔들 사이에 놓았더니 그동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다른 찻잔들이 일순  '오징어'가 되어버렸다. 

신문 기사가 나자 전화가 왔다.
신문에서 본 똑같은 찻잔을 소장하고 있는데 관심이 있느냐고. 기쁨에 들떠 주소를 받아적고 있으니 남편이 전자 담배를 챙기고 망연자실 밖으로 나갔다.

1시간 30분 거리를 달려가자 진짜 똑같은 찻잔이 있었다.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한꺼번에 두 개가 나타나다니. 
당신의 어머니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은 찻잔이라며 소중하게 캐비닛에서 꺼내신다. 할머니의 62년 결혼 생활을 빛내주던 보물인데 이제 양로원에 가기 전에 누군가 소중하게 간직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할머니의 긴 세월, 추억과 아쉬움이 담긴 찻잔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라고 기도했다. 

이제 특별한 신고식을 할 차례.
찻잔은 차를 따르는 것으로 완전해진다. 할머니의 62년 긴 결혼 생활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 고른 차. 

‘Grand wedding loose tea'
이 차는 싱가포르의 유명한 티 브랜드, TWG에서 만든 loose차(잎차)다. 홍차에 해바라기꽃과 과일을 넣어 달콤하고 향긋하게 블랜딩한 가향차다. 

쌍둥이처럼 닮은, 내가 경매에서 이긴 찻잔과 할머니의 찻잔을 나란히 놓고 Grand wedding loose를 우려낸다. 
설렘같은 향기와 달콤한 첫맛.
과연 이름처럼 웨딩 마치의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는 맛이다. 
남편은 여전히 뾰로통하다. 코로나로 다들 힘든 이 판국에 비싼 찻잔을 한꺼번에 둘씩이나 들였으니 걱정하는 것도 알겠다. 

살짝 귀띔해주면 풀리려나. 국제 시세로 지금 2,000불에 거래되는 찻잔이라고. 
우아한 재테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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