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sy의 차이야기 열일곱 번째] 봄은 팝콘이다

김원경 승인 2021.03.24 10:05 | 최종 수정 2021.03.24 11:33 의견 0

봄을 기다린다.
한국은 꽃소식이 한창이지만 우리 가게 앞 정원에는 눈더미가 한숨처럼 쌓여있다. 
겨울이 혹독한  북아메리카에 사는 우리에게 봄은 간절하다. 
이민 오고 처음 맞이한 봄에 처음 보는 이웃 남자가 마침내 봄이 왔다고 남편을 껴안아서 깜짝 놀랐다. 왜 이들은 여름 야외 활동에 그토록 필사적인가. 
제3 세계의 인민들이 가파른 삶에서 바둥거릴 때, 선진국에 팔자 좋은 시민으로 태어나 여름이면 깊은 계곡을 찾아 카약을 타고, 자작나무를 몇 시간씩 불에 태우며 마시멜로를 구워 캠핑을 즐기는 이들에게  질투어린 욕지기가 났다. 

내가 그들을 이해한 건 두 번의 겨울을 겪고 난 후다.
어떤 이들은 캐나다의 계절을 설명할 때  Winter-August-Winter란다. 좀 과장된 것이겠지만 그만큼 겨울이 길고 봄여름은 안타까울 만치 짧다.
심지어 식물들도 캐나다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안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신 토종 깻잎을 뒷마당에 심었더니 숨죽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와 하루에 몇 센티씩 허겁지겁 자라서 씨를 뿌리고 장렬하게 서리를 맞아 얼어 죽었다. 한두 달 만에 한살이를 마쳐야 하니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러니 캐나다의 봄은 천만금 같은 신호다.
길거리 눈더미들이 녹기 시작하는 딱 요맘때는 나도 필사적으로 된다. 악착같이 햇볕을 즐기고 비즈니스를 꿈꾸고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긴긴 겨울밤을 견디며 파먹으려면. 

마침내 대지가 꿈틀댄다.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꿈틀댄다. 우리 집 주차장도 아스팔트가 녹으며 꿈틀대서 군데군데 깨졌다. 이웃집은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니 마루가 푹 꺼져서 기울었다. 

푸릇푸릇 새싹이 머리를 내밀었다. 탕하고 신호가 오면 줄달음을 칠 것이다. 나도 계획을 짠다. 

첫 번째로는 노란 드레스를 입을 것이다. 
봄이 오는 터질듯한 기쁨을 나도 알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들의 여름 호사가 사실은 기나긴 겨울을 견디기 위한 필사적인 광합성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두 번째, 뉴에이지 밴드를 만들 것이다. 첼로 켤 줄 아는 멤버를 구하러 구인 광고를 내야겠다.
겨우내 머릿속에 쌓인 노래들이 나가려고 아우성친다. 

세 번째, 교외에 봐 둔 고풍스러운 건물을 고칠 것이다. 유적으로 등록된 100년도 넘은 빅토리아 양식의 고택으로 손볼 곳이 많지만 둥글게 솟은 첨탑 지붕을 새로 덮고, 작은 개울이 있는 뒷마당에 꽃밭을 만들고, 3층 옥탑에는 펀디만 강이 흐르는 걸 보며 몸을 씻을 수 있게 목욕실을 만들면 근사해질 것이다. 다만 남편이 겨우내 팔심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게 문제다. 

겐마이차(Genmaicha)를 우리며 일정표를 쓴다.
팝콘차라고도 불리는 구수한 차. 한때 누룽지에 중독되었던 내가 특별히 머리를 쓸 때 마시는 차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거나 노래를 쓸 때 누룽지가 없으면 일이 되지 않았다. 치과에서 누룽지를 더 먹다가는 남은 어금니도 임플란트해야 한다고 마지막 경고를 받은 후 금단현상에 시달리다 찾아낸 게 겐마이차다. 쌀이 들어 있어서인지 제법 누룽지를 끊고도 뇌 
회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옛날 15세기 일본의 한 사무라이가 전투 준비에 한창일 때 부하 겐마이가 차를 우려 바치는데 실수로 쌀을 넣고 우렸다. 급박한 전투 상황에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던 사무라이가 겐마이의 목을 베었다. 나중에 사무라이가 차를 맛보았더니 현미와 차가 어우러진 향이 신묘하였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하를 기려 '겐마이차'라는 이름을 널리 전했다 한다. 
아마 겐마이도 누룽지 차의 신기한 작용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복잡하게 꼬인 전황을 풀어내는 데 쌀을 카테킨에 섞은 차가 뇌 회전을 도와 좋은 작전을 짤 수 있으리라는 충심으로 차를 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실수가 아니었다. 

남편이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느냐며 불안한 표정으로 물으러 왔다. 
남편에게 한국인 사범이 운영하는 시내 검도 도장에 월권을 끊어 놓았다고, 요즘 힘이 들어 보여 걱정이라고 말했다. 미리 사놓은 최신 유행 트레이닝복과 갖고 싶어 하던 운동화를 건네주었더니, 안 그래도 힘이 달려서 뭔가 시작해볼 참이었는데 이리 미리 챙겨주니 참 사려 깊은 마누라고 싱글벙글 웃는다. 

남자는 참 단순하다.
난 빅토리아 건물에 깔끔한 톱질이 필요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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