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티베트 30편] 시가체의 상징 타쉬룬포(扎什伦布寺)사원

백민섭 승인 2021.07.12 13:18 | 최종 수정 2021.07.12 13:33 의견 0

하늘색 빼고는 모든 것이 누렇게 물든 티베트 고원을 지나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도시 시가체(日喀則).

라싸에서 280여 킬로미터 떨어진 시가체는 얄룽장뿌강과 지류의 합수지점으로 ‘토지가 풍부한 정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타쉬룬포에서 본 시가체
타쉬룬포에서 본 시가체

시가체(日喀則)는 티베트에서 라싸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과거 창지방(Tsang, 시가체지구가 포함된 중부 티베트)의 수도였다.

오랫동안 교역과 행정의 중심지로서 6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다. 티베트의 여느 도시처럼 시가체도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라싸하면 조캉사원이 있듯이 시가체에는 타쉬룬포사원이 있다.

송첸감포왕 이후 왕조가 아닌 불교 종단에 의해 지배를 받은 티베트는 일종의 종교적 공동체였다. 각 지역은 라마(喇, Lama)라 불리는 법왕들이 분할하여 다스렸다. 달라이라마 (Dalai Lama)는 라싸 지역을, 판첸라마(Panchen Lama)는 시가체 지역을 다스리는 법왕이다.

17세기 티베트 전역을 통일한 겔룩파(黃帽派)의 수장이자 강력한 전제 군주였던 달라이라마 5세가 라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다. 특히 교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창지방(시가체 지구)에 자신의 스승인 ‘롭상 최키 갈첸(Lobsang Choekyi Galtsen)’을 제4대 판첸라마로 임명하면서 판첸라마를 정치적 동반자로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판첸라마의 계보가 시작되었다.

티베트에서는 달라이라마(‘달라이’는 바다라는 뜻의 몽골어, ‘라마’는 스승을 뜻하는 티베트어) 다음으로 영적인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다.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찾거나, 환생한 달라이라마의 교육을 담당하는 것은 판첸라마의 역할이다. 반대로 판첸라마가 입적하게 되면, 달라이 라마가 판첸라마의 환생을 찾아 후임을 임명한다. 이런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있어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가체에 오면 반드시 타쉬룬포는 보아야한다.

중부 티베트의 랜드마크요 역사교과서다.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려면 타쉬룬포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타쉬룬포사원(扎什伦布寺)은 겔룩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총카파의 제자인 제1대 달라이라마 ‘겐덴 드룹(Genden Drup)’이 1447년에 세운 사원으로 오늘날까지 판첸라마의 거주 사원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대뿡사원(드레풍)과 더불어 티베트 최대 사원 중 한 곳으로 꼽히는 타쉬룬포는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에 벌어진 대대적인 사원 파괴에서 살아남은 몇 개의 사원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라싸의 대뿡사원을 최대 사원으로 꼽았으나, 문화혁명기의 광풍을 겪으면서 온전하게 남은 건물로는 이제 타쉬룬포가 실질적인 티베트의 최대 사원이나 다름없다. 전성기에는 타쉬룬포에 무려 약 5000명의 승려들이 기거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약 800여 명의 승려들이 있다고 알려진다.

타쉬룬포사원이 유명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역대 판첸라마들의 미라형태의 육신이 바로 이곳 영탑전(靈塔殿)에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시가체 서쪽 거대한 바위산 니써르산(尼色日山)에 자리 잡고 있는 타쉬룬포를 찾았다. 다운타운 서쪽 끝에 면해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입구에 다다르자 예의 악다구니하는 티베트 어린아이와 장사꾼들이 쏜살 같이 모여 들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사원 입구는 규모에 맞지 않게 겨우 차 한대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 그 옆에 매표소가 있다. 라마승들이 직접 입장료를 받는데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1인당 중국 돈 85위안, 한국 돈으로 약 15,000원에 이른다. 양국의 물가 차이를 감안하면 비싼 편이지만 어쩔 수 없다.

타쉬룬포는 시가체의 중심사원이기도 하고 11대 판첸라마가 거주하는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타쉬룬포사원(扎什伦布寺) 전경
타쉬룬포사원(扎什伦布寺) 전경

멀리서 보아도 금빛으로 반짝이는 전각들의 황금지붕이 유난히 눈에 띈다.

사원 입구를 들어서면 광장이 나오고 광장 너머로 우뚝 솟은 건물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마치 작은 도시에 들어선 느낌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왼쪽 끝에 있는 붉은 색 건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미륵불이 안치되어 있는 잠캉첸모(强巴佛殿, Jamkhang Chenmo-26m 크기의 미륵불을 모신 법당) 법당이다. 오른쪽 방향으로 나란히 서있는 황금지붕은 좌측부터 차례대로 10대(시숨남겔, Sisum Namgyel), 4대(쿤둔라캉, kundum Lhakhang), 5대와 9대의 판첸라마 영탑(灵塔)인 타시남겔(Tashi Namgyel) 순으로 모셨다.

앞쪽은 주로 승려들의 주거 공간이고, 뒤쪽 황금색 지붕들이 판첸라마의 묘역과 예불 수행공간이다. 무작정 아무 길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하얀색 회칠을 한 티베트 전통가옥이 다닥다닥 미로형으로 조성되어 있어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분간하기 쉽지 않다.

미륵불을 모신 잠캉첸모(强巴大殿) 대법당
미륵불을 모신 잠캉첸모(强巴大殿) 대법당

입구에서 이정표를 따라 광장 왼쪽으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크게 도는 것이 관람 코스다.

마니차와 쵸르텐을 지나 왼쪽 끝까지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10대 판첸라마 초에키 게르첸(確吉堅贊 Qoigyi Gyaicain, 1938년~1989년)을 모신 '시숨남겔(Sisum Namgyel)' 영탑이다.

10대 판첸라마는 특별한 지도자였기에 관심이 더하다. 중국인 출신이면서도 1959년 라싸봉기 직후, 티베트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라는 7만자에 달하는 탄원서를 마오쩌둥에게 보내고, '달라이라마가 티베트의 영적, 세속적인 지도자'라는 대중연설을 함으로써 중국 정부에 정면으로 맞섰던 인물이다. 그로인해 10대 판첸라마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가 1978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 후에도 정치적 연금 상태에서 통제를 받다가 1989년 돌연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티베트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중국 측에 의한 독살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1993년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높이 33.17미터, 총면적 1,933평방미터에 이르는 금장 영탑을 지어 10대 판첸라마의 법체를 모시게 된다. 그것이 시숨남겔(Sisum Namgyel, 十世班禪靈塔殿)’이라는 영탑이다.

10대 판첸라마 영탑
10대 판첸라마 영탑
10대 판첸라마 영정
10대 판첸라마 영정

어두운 전각에 들어서자 시주를 챙기는 라마승 두 명이 눈에 거슬렸으나 이내 10대 판첸라마의 등신불이 눈에 든다. 10대 판첸라마는 화려한 금장으로 장식된 미라로 모셔져 있다. 재임 초기 중국 공산당에 협조하고 박해 이후 말년에는 자아비판을 하고나서야 복권되는 등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판첸 라마 재임시 대부분을 중국정부에 야합하지 않고 티베트적으로 살았던 지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마치 살아 있는 듯 부리부리한 눈과 표정이 인상적이다.

잠캉첸모(强巴大殿)와 판첸라마의 궁전을 지나 타쉬룬포에서 가장 큰 켈상라캉(Kelsang Lhakhang-대법당)이 이어진다.

두 곳의 승가대학은 켈상라캉에서 정문으로 내려오는 길에 만날 수 있으며, 대법당 위쪽 산자락에서는 40m 높이의 탕카벽을 볼 수 있다.

타쉬룬포의 중심인 켈상라캉은 사원의 가장 오래된 초기 건축물이다. 안에는 판첸라마가 사용하던 옥좌가 있고, 역대 판첸라마를 그린 탕카도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의 중요한 법회나 행사는 바로 이곳에서 열린다.

(좌측) 대법당(Kelsang Lhakhang), (가운데) 5대~9대 판첸라마 영탑전(타시남겔, Tashi Namgyel)과 강경장(讲经场)
(좌측) 대법당(Kelsang Lhakhang), (가운데) 5대~9대 판첸라마 영탑전(타시남겔, Tashi Namgyel)과 강경장(讲经场)

티베트사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신정체제(神政體制)의 정점이었던 사원은 수많은 민중을 노예처럼 부린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것이 최근인 1950년대까지 이어진 승려들의 추한 이면이다. 중생을 구제하기보다 더 탄압하고 고혈을 쥐어짰던 주체가 바로 승려라는 사실은 쇼크다. 욕망을 버려야 영원히 산다고 믿는 것이 티베트불교의 원리라고 설법했지만 황금으로 뒤덮은 거대한 불상과 영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들에 얽힌 시시비비를 알게 되면서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화려한 황금부처는 지배층 승려의 염원이 아닌, 가난한 중생의 갈망과 헌신에 더 응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 중생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판첸라마의 집 타쉬룬포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타쉬룬포사원에 대한 평판은 복합적이면서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근대 티베트 사원 중 가장 잘 운영되고 있는 최대의 사원이며 유물도 비교적 잘 보전되고 있다. 반면, 승려들이 불친절하고 몇몇의 승려들은 중국정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물론 확인이 필요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중국의 간섭을 받던 티베트는, 결국 중국에 의해 판첸라마가 창지방(Tsang-시가체 지역)과 서부티베트의 지도자로 임명되면서 달라이라마와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중국이 종교적 갈등구조에 착안해 만든 이이제이(以夷制夷)수법으로 소수민족에게 지속적으로 시도해 온 정책의 일환이다. 궁극적으로는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를 분열시키려는 의도다. 그 의도가 적중하여 1929년 13대 달라이라마와 9대 판첸라마 사이에 타쉬룬포사원의 자치권을 놓고 심각한 분쟁이 벌어지자 판첸라마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그 후 9대 판첸라마는 끝내 티베트로 돌아오자 않았고 1937년 중국에서 사망했다. 여기서부터 사단이 일어난다.

현재 티베트에서는 제14대 달라이라마의 망명으로 판첸라마가 최고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다. 원래는 1995년 현 달라이라마가 망명지인 인도 다람살라에서 11대 판첸 라마 환생자로 지명했던 게둔 초에키 니마 (Gedhun Choekyi Nyima, 1989~ )가 실질적인 지도자여야 했다. 그러나 지명 직후 사흘 만에 종적을 감추면서 중국 정부에 의한 납치 또는 암살설 등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당시 6세였던 판첸라마는 세계에서 가장 어린 정치범으로서 수형생활을 하는 것으로 의심했다.

결국 2015년 중국 정부가,

"니마는 살아있다",

"그는 현재 (티베트에서) 교육을 받으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몸도 건강한 상태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등) 그 누구로부터도 간섭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밝히면서 생존을 공식 확인시킨 바 있다.

살아있기는 하지만 연금 중인 판첸라마를 대신해 1996년 중국정부는 부모가 공산당원인 기알첸 노르부(堅贊諾布, 1990년~ )를 11대 판첸라마로 지명했다. 그 이유야 짐작하기 쉽다.

중국이 옹립한 이후 10여 년 동안 베이징에서 중국정부의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11대 판첸라마가 섭정을 하고 있다. 그래서 타쉬룬포는 중국 정부에 협조하는 어용 판첸라마가 이끄는 사원이라 의심을 받고 있다.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은 중국이 임명한 11대 판첸라마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전히 티베트인의 마음속에는 ‘달라이라마’만이 유일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다.

향후 현 제14대 달라이라마인 텐진 가초(Tenzin Gyatso, 1935~)가 입적하게 되면,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찾거나, 교육을 담당하는 판첸라마의 전통적인 역할을 중국정부 주도로 이행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중국의 꼭두각시인 제11대 판첸라마로 하여금 차기 제15대 달라이라마 환생자를 지명할 가능성이다. 그리되면 판첸라마에 이어 달라이라마도 중국공산당의 꼭두각시로 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깊다.

2019년4월11일, 중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티베트 종교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환생은 중국법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과거 달라이라마를 중국 황제가 지명했던 전통이 있으므로 차기 달라이라마는 중국정부가 지명하겠다는 뜻이다.

중국정부의 의중을 간파한 달라이라마는

"후계자는 교황 선출 방식처럼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해야 한다"

고 공언했다. 달라이라마가 후계자 선택에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데에는 중국 정부를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다.

그러나 시계추는 기울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였던 달라이라마마저 중국의 꼭두각시로 채워진다면 지구상에서 다시는 티베트라는 나라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싸에서 시가체까지 연장한 칭짱철도가 2018년3월15일 정식 개통되었다.

시가체까지 철도가 연장된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티베트 내륙 깊숙이 철도가 들어오면 티베트의 변화는 한층 가속화될 것이고, 나아가 이 철도를 네팔이나 인도로 연장하여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신실크로드 경제권을 형성하고자하는 중국의 국가전략)를 구현하려는 계획이다.

실제로 네팔과 인도는 철도를 통하여 중국과 연결되어 경제교류가 활발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가 한 경제권으로 묶이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양국이 합쳐서 26억이 넘는 경제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40%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다.

인도는 최근 들어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인도와 중국이 가까워지면 다람살라(Dharamsala)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용한 인도의 입장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이라마의 티베트망명정부가 고립될 수도 있다.

그러나 2018년 10월. 인도와 오랫동안 경제협력관계를 유지했던 네팔이 중국과 전격적으로 경제협력을 맺음으로서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신 냉전 분위기로 급변했다. 네팔과 인도의 불편했던 역사적, 정치적 관계를 고려하더라도 오랫동안 경체공동체를 유지했던 양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전격적인 이별이었다. 인도와 중국은 그만큼 소원해질 수밖에 없고 티베트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라다크도 안정을 찾게 됐다.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을 재촉하기 위해 서둘러 사원을 빠져 나오는 길. 그늘진 벽에 기대 앉은 노승이 지나가는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 주고 용돈을 챙기고 있다. 또 다른 노승 2명은 사탕 항아리를 한 병씩 들고 가다가 환한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한다. 한때 5천명이 넘는 승려가 수행을 했던 유서 깊은 사원에 정작 수행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뜨거운 고원의 햇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넓은 사원을 돌고 도는 순례자들의 초자연적인 의지만이 타쉬룬포의 명백을 이어가는 듯 했다.

티베트의 2대 사찰이고 정신적 지주라는 명성 때문에 숙연한 마음으로 사원을 순례했지만 개운치가 않다. 타쉬룬포의 찬란한 겉치레에서 고색창연(古色蒼然)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어었을까?

타시룬포사원 앞에 있는 노점상
타시룬포사원 앞에 있는 노점상
타시룬포사원 앞에 있는 노점상
타시룬포사원 앞에 있는 노점상
타시룬포사원 앞에 있는 노점상
타시룬포사원 앞에 있는 노점상

사원을 나서자 좌측으로 노점상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거의 프리마켓과 같다고 보면 된다. 번듯한 상가보다는 낡은 천막으로 장사진을 이룬 거리가 훨씬 매력적이다. 잠시 여정을 멈춘다.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나일론 천막에 진열된 다양한 토산품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 중 꽤 많은 액세서리가 네팔, 인도에서 수입된 물품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눈에 차고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 참 많다. 협상의 능력에 따라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으니 그다지 손해 볼 일은 없다.

마른먼지에 휩싸인 시장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이방인들에게는 풍경 하나 하나가 신비하고 경이롭다.

시장은 어느 순간 불똥이 튀듯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사원을 찾는 순례자와 상인과 여행자들의 흥정이 더해져 점점 달아오르고 있다. 

타쉬룬포 사원 앞의 유명하다는 전통 수여우차(酥油茶)전문점 따지에(搭杰茶馆, Dajie Tea House)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창가에 앉아 구수한 버터차로 고원의 햇살을 음미하며 잠시 여독을 풀고 있을 때였다. 태어나서 한번도 목욕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한 무리가 눈에 들었다. 손에 들린 마니차가 쉴 새 없이 도는 것으로 보아 순례를 도는 일가족이다.

전통의상은 때에 절어 햇빛이 반사될 정도고 누런 콧물이 딱지가 된 채 엄마 등에 업혀 졸고 있는 아이는 심하게 흔들린다. 생활도구들을 담았을 커다란 마대자루 지고 뒤를 따르는 이는 아빠로 보였는데 공교롭게도 수여우차를 마시던 내 눈과 마주쳤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에 검게 그을린 얼굴 사이로 하얀 미소를 보내주었다. 그들의 신성이 마치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전해진다.

삶에 지친 이들이 분명 맞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힘들다 말하지 않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겠다는 신념 같은 미소였다. 그들만의 염원을 쫓아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오랫동안 눈이 머물 수 밖에.

문득 시가체를 떠나기가 싫어진다. 이렇게 인간적이고 평화스러운 순간을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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