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바 속촉 수어사이드 스쿼드

이현수 승인 2022.06.03 13:17 | 최종 수정 2022.06.03 13:34 의견 0

지난 시간에 이어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The Suicide Squad’ (2021, 제임스 건 James Gunn, 2시간 12분)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 이 영화는 ‘이중성’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마무리했습죠. 이야기도 ‘이중성’, 캐릭터도 ‘이중성’, 그래서 형식도 ‘이중성’. 오늘은 이 ‘이중성’ 이야기와 함께 레트로 이야기 그리고 제임스 건이 항상 반복하는 좋은 부모/나쁜 부모 이야기와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정의되는 이상적인 가족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영화의 첫인상은? 바삭바삭. 60분 쯤 보고 나면? 촉촉촉촉.

지난 회에도 언급했듯 이 영화의 마케팅은 이 작품이 소위 ‘약을 한껏 들이킨’ 작품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주력했다. 트레일러, 캐릭터 영상, 보도 자료 등등이 모두 이러한 톤 앤 매너 하에 만들어서 배포되었고 인터넷에서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이나 팬들의 게시물도 이 작품이 얼마나 ‘약을 빤’ 작품인지에 초점을 맞추고는 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말 그런 ‘약을 빤’ 작품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물론 약을 빨긴 빨았지만 이 영화는 ‘마약’이 아니라 ‘처방약’을 빨았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이 영화의 스토리가 이중성을 다루고 있고 그래서 영화 전체를 페이크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심지어 이 페이크 오프닝의 주인공들을 데리고 페이크 마케팅 캠페인까지 진행했다.) 이야기는 전편에서 다루었으니 이 영화가 어떻게 이야기와 주제를 형식적으로 도드라지게 드러냈는지 몇 개의 케이스들을 다루며 살펴보기로 하자.

이 영화는 롱테이크와 트래킹숏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특히 영화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해 이 장치들을 훌륭하게 사용하는데, 인간의 몸에 폭력이 가해지고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을 한 테이크로 담아내는 걸 즐긴다. (그리고 그 효과의 극대를 위해 프랙티컬 VFX Practical VFX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킹 샤크가 사람을 반으로 찢는 그 유명한 장면도 현장에서 인체 더미를 반으로 찢으며 촬영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 했다.) 배우의 연속된 동작을 끊임없이 그대로 담는 롱테이크는 컷과 컷의 조합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인간의 행동을 더블 액션 편집 없이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영화 속 시간과 실제 시간이 일치하게 되면서 일상이 스펙터클로 변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준다.

'노스탤지어 Nostalghia'(198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 2시간 5분)
'노스탤지어 Nostalghia'(198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 2시간 5분)
'안개 속의 풍경 Topio stin omihli'(1988, 테오 앙겔로풀로스 Theodoros Angelopoulos, 2시간 7분)
'안개 속의 풍경 Topio stin omihli'(1988, 테오 앙겔로풀로스 Theodoros Angelopoulos, 2시간 7분)

이 두 영화는 롱테이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시간의 기록에 한계를 가진 필름 카메라로 촬영된 롱테이크는 숏의 지속시간이 1초 1초 늘어갈수록 서스펜스에 가까운 스릴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로 오면서 롱테이크숏의 파괴력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애초에 디지털 카메라는 시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기에 (기록 가능한 시간의 한계도 없고, 디지털 환경은 공간을 가상으로 그리듯 시간도 가상으로 그려낸다.), 숏이 지속되든 컷이 되어 편집되든 별 감흥이 없게 된다. 아예 롱테이크숏이라는 것이 ‘우리 영화의 기술팀은 공간과 시간을 이렇게 가상으로 그려내어 붙여낼 수 있는 쩌는 기술력이 있습니다.’라는 어필이 되어버렸고, 현대 영화에서는 인물의 움직임, 공간의 변화, 시간의 가속과 감속, 슈퍼 모바일 카메라가 복합된 복잡한 롱테이크숏이 영화를 순간 게임으로 바꿔놓아 영화 전체의 톤 앤 매너를 이탈시키는 작품들도 많이 목격되고 있다. 롱테이크를 써야 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으니까 쓰는 것은 매력이 없다.

디지털 시대의 롱테이크숏을 작품의 필요에 의해 적절하게 사용한 좋은 예시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Kingsman: The Secret Service’ (2014, 매튜 본 Matthew Vaughn, 2시간 9분)

게임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 번의 컷이 없는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갓 오브 워 God of War’ (2018, SIE 산타모니카 스튜디오 SIE Santa Monica Studio, 코리 발록 Cory Barlog)는 작품의 주제에 대한 표현, 기술력의 과시 양쪽을 모두 잘 나타낸 경우라 할 수 있다.

각설하자면 이전의 롱테이크숏이 일상을 비일상으로 승화시켰다면 요즘의 롱테이크는 비일상을 일상으로 끌어내리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더 이상 길을 걷거나 숨을 쉬는 인간은 롱테이크로 촬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도끼를 들고 수십 명의 뚝배기를 가르거나, 썰고 자르고 쏘고 베는 것은 롱테이크로 촬영한다. 마치 무대 위의 마술사가 자신의 손에 아무 장치도 없다는 걸 관객들에게 확인시켜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롱테이크와 트리킹이 합쳐진다면? 다시 한 번 인류 최고의 롱테이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불러보자.

‘노스탤지어’ 마지막 장면의 그 유명한 롱테이크. 인물의 속도와 동일한 속도로 수평 트래킹하는 카메라의 운동성과 좌우로 반복되는 수평 이동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꽉 찬 미장센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남자의 절실한 행동과 만나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기를 만들어낸다.

‘희생 Offret’ (1986,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2시간 29분). 롱테이크와 수평 트래킹, 패닝이 결합된 장면. 인물의 속도보다 빠르기도 느리기도 한 역동적인 카메라의 수평 운동과 패닝이 결합되어 뒤쪽 배경이 좁은 공간에서 갑자기 넓은 공간으로 열리게 되면서 시각적으로 엄청난 압도감을 준다. 이 역동성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집에 불을 지른 저 노인의 꿈틀거리는 마음속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해서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자, 이제 니쥬는 다 깔았고, 본격적을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롱테이크와 트랙숏을 살펴보자. 영화에서 자살 특공대의 리더 블러드스포트 Bloodsport (이드리스 엘바 Idris Elba)와 ‘또라이’ 피스메이커 Peacemaker (존 시나 John Cena)는 사사건건 대립한다. 둘은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하게 자라난 킬러이지만 최고로 여기는 가치, 대변하는 이데올로기, 복장, 언행 모든 것에서 대척점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처음으로 적진에 진입하면서 이 둘은 누가누가 사람을 더 잘 죽이는지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하고 급기야 사람 죽이기 경연대회를 열게 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수평 트래킹 롱테이크 숏이 시작된다.

숏의 시작. 택티컬하고 현실적인 의상을 입은 블러드스포트가 전경에서 상대의 목을 조르고 있고 알록달록 만화적인 의상을 입은 피스메이커(극중에서 변기뚜껑을 뒤집어썼다고 놀림 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후일담인 TV 시리즈 ‘피스메이커 Peacemaker’에는 저 변기뚜껑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는 놀라운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가 후경에서 손도끼로 상대의 멱을 따고 있다. 카메라가 x축과 y축, z축을 동시에 이동하며 엄청난 공간 이동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현대의 롱테이크숏과 달리 오직 x축으로만 이동하는 카메라가 담아내는 숏이다. 그러나 전경과 후경의 인물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움직이고, 카메라 역시 인물들을 지나쳐갔다가 다시 인물들에게 따라잡히기도 하며 세 개의 가로 이동이 굉장히 역동적인 운동성을 만들어낸다.

이 범상치 않은 이동 숏에서 이들은 마치 쿠키를 먹거나 신발 끈을 묶듯이 사람들을 죽인다. 자신이 죽이는 대상은 쳐다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면서 해먹에 누워 자는 상대를 손도끼로 야무지게 찹찹찹 찍어대는 피스메이커의 모습은 살인이라는 비일상적 행위를 일상적 행동처럼 보여줌으로써 굉장히 큰 정서적 충격을 안겨준다. 앞서 현대 영화의 롱테이크숏은 비일상성에 일상성을 부여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트래킹 롱테이크숏은 이 예시에 딱 들어맞으며 영화의 두 축이 되는 블러드스포트와 피스메이커의 공통점과 다른점 그리고 이 이야기가 벌어지는 영화 속 세상의 잔혹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영화에서 좋은 장면이란 한 장면이 한 가지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고 영리한 감독들은 이러한 장면들을 영화 곳곳에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반대로 무능한 감독들은 한 장면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푸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그리고 이 가로 트래킹 롱테이크 숏은 안정적인 스틸 미디움 숏으로 편집되면서 엄청난 시각적 대비를 드러내게 된다.

자살 특공대가 수많은 적들을 죽이고 전진한 이유는 바로 이 스틸의 인물 릭 플래그 대령 Colonel Rick Flag을 적진에서 구출해내기 위해서이다. 길고 충격적인 살육의 롱테이크 뒤에 떡하니 숏 사이즈/키메라 이동/시선의 방향이 모두 정반대인 숏이 등장하는데, 시각적 정보의 반전이 이야기의 반전을 끌고 나오게 된다. 릭 플래그는 적들에게 잡힌 것이 아니라 우리편이 되어줄 저항군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이 자살 특공대는 동료를 구하겠다며 강력한 아군이 되어줄 저항군들을 모조리 다 몰살시켜버린 것이다. 이들의 행위는 무의미하며 작전이 진행되는 듯 보였던 앞 장면들은 작전을 죄다 후퇴시켜버리는 장면으로 재해석되고 만다. 마치 페이크 오프닝을 내세워 영화 전체를 리셋시켰던 전략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 영화는 끝까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전 세계적으로 트래킹 숏을 가장 잘 쓰는 감독 중 한 명은 봉준호이다. ‘마더 Mother’ (2009, 봉준호, 2시간 8분)에 그 중 가장 압권인 수평 트래킹 숏이 담겨있다. 바로 위 스틸 속 병원 장례식 막걸리 장면. 숏의 길이는 길지 않지만 그 엄청난 운동성과 인물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동안 카메라가 각기 다른 인물들을 잡아내며 운동의 속도를 달리하고 후경의 공간을 조였다가 다시 펼치면서 이 장면까지 쌓여왔던 긴장과 갈등을 시각적으로 분출시켜버린다. 봉준호는 수평 운동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영원히 수평 운동하는 기차에 대한 영화를 찍기까지 했다.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자크 Antonín Leopold Dvořák 이후 가장 성공한 기차 덕후일 것이다. 드보르자크는 기차를 만들어 볼 수만 있다면 자신이 쓴 교향곡을 다 줄 수 있다했으니 봉준호는 자신이 만든 영화 몇 편까지 내줄 의향이 있는지 누가 물어봐주기 바란다.

2. 레트로는 왜 레트로?

제임스 건 영화들의 특징은 레트로이다. 그의 출세작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Guardians of the Galaxy’ (2014, 제임스 건, 2시간 1분),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Vol.2 Guardians of the Galaxy Vol.2’ (2017, 지임스 건, 2시간 16분)도 80년대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역시 80년대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속편인 ‘피스메이커’에서 피스메이커는 80년대가 왜 끝내주는지 일장연설을 하기도 한다. 물론 레트로는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유행이기는 하다. 이는 80년대에 대한 그리움과 90년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뉘고 최근에는 더 내려가 70년대와 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극의 배경이 과거가 아니더라도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 [2016 -, 맷 더퍼 Matt Duffer, 로즈 더퍼 Ross Duffer, 4시즌 35에피소드]처럼 80년대가 배경이 아님에도) 80년대 혹은 90년대의 스타일과 미학을 적극 사용하는 작품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영화, TV 시리즈, 광고, 카페 인테리어 등등 레트로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특히 판데믹 사태를 맞아 모든 것이 좋았던 황금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더 강해지고 레트로는 점점 더 수요가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제임스 건의 영화들은 모두 현대를 배경으로 하나 80년대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 그러나 제임스 건의 영화들은 레트로가 필요해서 레트로를 쓰는 것이기에 레트로가 유행이니 그냥 한 번 레트로를 끼얹어보는 작품들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제임스 건의 영화들에는 왜 레트로가 필요한가? 그의 영화의 주인공들은 과거 어느 시점에 고정된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시간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주인공 ‘스타로드’ 피터 퀼 ‘Star-Lord’ Peter Quill. 그는 문자 그대로 1980년대에서 물리적으로 분리된 인물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지구로부터 강제로 떼어내져 우주로 던져진 그는 모체에서 강제로 낙태 된 뒤 시험관에 담긴 태아 샘플처럼 그가 지구를 떠날 때의 시간대에 강제로 고정되어진 인물이다. 과거의 한 시점에 고정된 인물이기에 피터 퀼은 고집불통에 남과 소통하지 않고 (과거에 고정된 인물이 어떻게 흐르는 시간 속의 인물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2차원의 존재가 3차원의 존재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 성장하고 마침내 진정한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로 거듭나면서 그의 시간은 다시 흐르게 된다. 80년대는 더 이상 그를 묶어두는 족쇄가 아니라 떠나온 고향,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갈 천국 (마치 바이킹들의 발할라처럼)으로 변하게 된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믹스 테이프에 미친 듯이 집착하던 강박적인 모습과 과거에서 벗어난 뒤 어머니의 선물을 열고 두 번째 믹스 테이프를 꺼내드는 그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퓨처라마 Futurama’ (1999 – 2013, 데이빗 X 코헨 David X. Cohen, 맷 그로닝 Matt Groening, 10시즌, 141에피소드 외) 중 시즌 1 에피소드 6인 ‘A Fishful of Dollars’. 1999년에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2999년에 깨어난 필립 J. 프라이 Philip J. Fry (빌리 웨스트 Billy West)가 우연한 기회에 억만장자가 되자 돈을 펑펑 쓰면서 자신이 살던 1990년대의 물건들을 미친 듯이 모으기 시작한다. 강제로 분리되어버린 시간대이자 자신의 모체인 1999년에 미친 듯이 집착하며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과거에 고착되어버린 그는 결국 흐르는 시간 속을 살아가는 현재의 동료들과 점점 거리가 벌어지게 되고 결국 과거를 떠나보내고 다시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김으로써 어른이 된다.

제임스 건의 영화 속 모든 주인공들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고착되어버린 인물들이다. 피터 퀼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체로부터 강제로 축출당하면서 과거에 고정된 인물들도 있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블러드스포트, 피스메이커, 폴카 닷 맨 Polka-Dot Man (데이빗 다스트말치안 David Dastmalchian), 랫 랫쳐2 Ratcatcher 2 (다니엘라 멜키오르 Daniela Melchior)처럼 과거의 트라우마, 잘못된 부모, 가혹한 사회로부터의 학대로 인해 과거 한 시점에 못 박혀 버린 인물들도 있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전통적인 얼굴마담 할리 퀸 Harley Quinn (마고 로비 Margot Robbie)이 그다지 돋보이지 못했던 것도 이런 매력적이 전사를 가진 캐릭터들 뒤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할리 퀸은 딱히 못박힌 과거가 없이 시간의 흐름을 잘 타고 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들은 모두 과거의 망령들이고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 내지 무덤을 표현하기 위해 80년대는 필수적으로 소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임스 건의 영화 속 레트로 스타일은 마냥 향수에 젖은 좋았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만은 아니다. 그의 영화 속 레트로는 어딘가 비뚤어지고 기괴한 반쯤 무너져 내린 세상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이다. 레트로가 유행이니 우리도 레트로 스타일 한 번 써보자와 레트로가 필요하니 스타일적으로 녹여내서 작품에 반영하자는 이렇게 차이가 크다.

과거에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피스메이커. 싸이코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 형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그는 과거 한 시점으로 계속해서 돌아가고 계속해서 괴로워한다. 옛날 음악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과거 속에서 고통 받는 그가 선택한 방어 기제이다. 마치 피터 퀼이 그러했듯. 피터 퀼도 피스메이커도 모두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 의식을 행한 뒤 비로소 과거에서 자유롭게 풀려나게 된다. 새로운 아버지,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이제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3.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자, 이제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을 살펴보자. 영화의 후반부 하이라이트. 미 정보국의 추악한 음모를 알게 된 릭 플래그 대령은 이 추악한 진실을 세상에 폭로하려 한다. 그러나 정보국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는 피스메이커는 그런 릭을 막아서고 둘 사이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자살 특공대의 타겟인 우주 괴물 스타로 Starro도 자신이 살던 시공간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낯선 곳에 던져진 존재이다. 마치 피터 퀼 같이. 한 마디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시간의 흐름 속을 살아가며 그 흐름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사악한 인간들 (남미의 독재자, 비도덕적인 미국 정보국)이 과거에 속박된 인간들을 이용해 먹으려하다가 오히려 한 방 얻어맞는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 후반부 릭과 피스메이커는 정말 처절하게 싸운다. 그동안 과장된 스펙터클로 연출되었던 폭력은 이 장면에서 정말로 살과 뼈가 부딪히는 처절한 싸움으로 묘사된다. 피가 튀어 얼굴과 옷을 흥건하게 적시고 먼지가 검게 묻은 얼굴은 땀으로 희번덕거린다. 주변의 사물들은 부서져나가며 화면 가득 먼지 파티클을 휘날리고 육중한 몸이 바닥에 메다꽂힌다. 심지어 이 모든 싸움은 아주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두 거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벗어날 수 없는 폐쇄공포증적인 공간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싸움이 점점 치열해지고 폐쇄공포증적인 풀숏은 점점 클로즈업으로 편집되어가고 감정은 격해진다.

폐쇄공포증적인 풀숏.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두 생각의 충돌은 이 빡빡한 풀숏 안에 감금된다. 마치 피스메이커 역의 존 시나가 레슬러 시절 자주 치루었던, 둘이 올라와 오직 한 명만 살아 나갈 수 있는 ‘헬 인 어 셀 Hell in a Cell’ 매치가 치루어지는 사각의 링이 연상된다. 이어지는 릭의 클로즈업. 명분도 싸움의 승기도 그가 우세하다. 아래에 깔린 피스메이커의 시점숏으로 보이는 그의 클로즈업은 극단적인 로 앵글로 기괴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릭의 심장에 깨진 변기조각 (피스메이커의 헬멧이 변기뚜껑이라고 놀림 받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꽤나 어두운 농담이다.)을 박아 넣는 피스메이커의 모습.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와도 같은 살인. 평화를 위해 죽인다며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던 피스메이커의 그나마 알량한 명분이 모두 깨져버리는 순간.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찬바람이 불 듯한 느낌을 안정적인 관찰자 시점의 풀숏이 환기시켜준다. 당황하는 릭, 당황하는 관객, 영화는 릭의 초크 클로즈업으로 이 당혹감을 점점 더 밀어붙인다. 이 씬 전체는 ‘숨이 막히는 밀폐된 분위기’ 하에 모든 장면들이 설계되었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관객들의 목을 조르던 공간의 압박이 풀어지고 공간이 갑자기 넓어진다. 그동안 장렌즈로 촬영되며 관객들을 압박하며 압축되었던 공간이, 단렌즈 촬영으로 바뀌면서 순식간에 넓게 펼쳐지게 된다. 양끝을 있는 힘껏 세게 당기며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이, 한쪽의 당기는 힘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풀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피스메이커의 얼굴에서 팬하여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랫 랫쳐2의 얼굴로 이동한다. 실제로는 두 숏으로 촬영한 뒤 카메라의 빠른 패닝을 이용하여 한 컷처럼 이어붙인 듯 보이는데 굳이 숏-리버스 숏이 아니라 한 컷으로 보이도록 잡아낸 이유는, 바로 여기가 이 자살특공대가 갈라서는 지점이며 모든 인물이 지녔던 이중성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면서 영원히 같은 시공간에 위치할 수 없게 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과거에 얽매이는 것을 문자 그대로 과거의 어느 한 시공간에 고정되는 방식으로 묘사했다고 이야기했던 점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같은 과거, 같은 아픔, 같은 팀으로 묶인 피스메이커과 랫 랫쳐2는 딱 이 순간까지만 한 시공간에 존재할 수 있도록 허락된다.

이어지는 장면은 피스메이커와 랫 랫쳐2를 숏-리버스숏으로 잡아낸다. 전경에 배치된 인물과 철장으로 고립된 피스메이커와 열린 공간에 위치시킨 랫 랫쳐2의 미장센 차이에 주목하길 바란다. 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선언이다.

4. 아임 유어 파더

이제 마지막으로 제임스 건의 영화들을 모두 관통하는 나쁜 부모-올바른 부모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이야기를 많이 할 필요도 없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주인공 피터 퀼의 ‘친부’ 에고 Ego (커트 러셀 Kurt Russell)와 ‘아버지’ 욘두 Yondu (마이클 루커 Michael Rooker)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주인공 피터 퀼의 ‘친부’ 에고 Ego (커트 러셀 Kurt Russell)와 ‘아버지’ 욘두 Yondu (마이클 루커 Michael Rooker)

지난 시간 블러드스포트가 어떻게 ‘친부’에게 학대 당했고 그래서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다가 좋은 ‘아버지’가 아닌 좋은 ‘인간’이 되면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위치로 이동하게 되는지 이야기했다.

피스메이커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피스메이커의 ‘친부’ 오기 스미스/화이트 드래곤 Auggie Smith/White Dragon (로버트 패트릭 Robert Patrick). 피터 퀼과 피스메이커는 마치 신화 속 이야기처럼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의 의식을 거친 뒤에야 그들을 얽매고 있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게 된다.

드라마 ‘피스메이커’에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던 정보국 국장 아만나 월러 Amanda Waller (비올라 데이비스 Viola Davis)의 딸 레오타 아데바요 Leota Adebayo (다니엘 브룩스 Danielle Brooks)가 피스메이커의 팀에 이중 첩자로 잠입하나 그녀 역시 자신을 괴물로 만들려는 ‘친모’를 거스르고 옳은 길을 택한다. 아데바요는 어머니를 생물학적으로 죽이지는 않으나 사회적으로 죽여버린다.

피터 퀼, 피스메이커, 아데바요는 피가 이어진 부모에게 학대받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강요당하고 심지어 살해당할 뻔 까지 한다. 이런 그들을 구원해주는 것은 피가 이어지지 않은 새로운 가족 구성원들이다. 이것이 제임스 건이 그려내는 대안적이고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가족은 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터 퀼의 친부 에고와 피스메이커의 친부 오기 스미스가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또한 피스메이커와 아데바요의 대안 가족의 리더인 클렘슨 먼 Clemson Murn (척우디 이우지 Chukwudi Iwuji)이 인종차별주의자인 자신들의 동족에게 반기를 든 인물이라는 점도 역시 의미심장하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아주 고전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 (그야말로 모든 수퍼 히어로 이야기의 원형)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이야기를, 그리고 낡고 잘못된 가치에 맞서 새롭고 옳은 가치를 세우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아주 세련된 형식으로 적절하게 풀어냈다. 모든 형식은 주제와 이야기에 맞춰 사용되었고, 주제와 이야기는 그 형식의 힘을 받아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를 제임스 건은 마블과 DC 양쪽에서 모두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이미지 출처=‘Nostalghia’ (Rai 2), ‘Topio stin omihli’ (Paradis Films, Greek Film Center, Greek Television ET-1, ‘Kingsman: The Secret Service’ (Twentieth Century Fox), ‘God of War’ (SIE Santa Monica Studio), ‘Offret’ (Svenska Filminstitutet (SFI), Argos Films), ‘마더’ (CJ Entertainment, Barunson E&A), ‘Guardians of the Galaxy’ (Marvel Studios, Walt Disney Pictures), ‘Guardians of the Galaxy vol.2’ (Marvel Studios, Walt Disney Pictures), ‘Peacemaker’ (DC Entertainment, The Safran Company, Warner Bros. Tele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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